정관정요

정관정요

  • 자 :오긍
  • 출판사 :글항아리
  • 출판년 :2013-09-02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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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의 번역으로 읽는 고전의 즐거움



김원중 번역 『정관정요』가 글항아리의 ‘동양고전’ 시리즈 제1권으로 출간됐다. 2003년 초판에서 문맥을 좀더 세련되게 다듬고 현대적 어투로 바꾼 이번 개정판은 책의 편제를 원전에 의거하여 권1~권10의 순서에 따라 재정리하였고 중간 중간 소제목을 넣어 독자들이 좀더 쉽게 동양의 경영 고전인 이 책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도록 했다.

역자는 교수신문 선정 최고 번역본으로 선정된 『사기열전』에서 보여준 동양 고전 번역의 기량을 이번 『정관정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원중 번역의 특징은 한 글자도 어긋남 없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우리말처럼 입에 딱 붙게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또한 한자로 이뤄진 문장이 갖는 고유의 여백과 긴장감을 잘 살려냄으로써 고대인의 사유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수월하게 이끌고 들어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번역을 찾게 만드는 핵심일 터인데, 거기에 꼼꼼하고 자세한 역주는 그 가치를 더해준다.





열린 정치와 소통의 리더십의 聖典



모든 조직은 개인으로 이뤄지고 상하 서열로 조직된다. 팀이 편성되고 팀 사이에는 알력과 협력이 있으며, 리더를 정점으로 모든 정보가 올라오고 내려간다. 이런 기본 틀은 역사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데, 말하자면 전근대 사회에서는 궁중 조직이 가장 복잡 미묘하게 진화된 형태로 오늘날의 기업의 민활한 조직 형태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는 조직의 우두머리였으며 신하들은 각 부서장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역사를 기술한 동양의 고전들은 일찍이 현대 사회에서 ‘리더십’의 지침이 되곤 했다. 왕이 다스렸던 사회와 수평적 관계가 확대된 오늘날 기업의 조직은 형태가 변화하긴 했으나, 어느 곳인들 조직의 기본 속성은 같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법가 사상의 대표 격인 한비의 사상이 오늘날 한 조직을 다스리는 원리로 읽히고, 사마천의 『사기』 역시 경제인들이 가장 즐겨 읽는 고전이 되고 있다. 그 고전들에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들어가 어떻게 상대방을 파악하고 나아가 조직을 다스리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무한정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仁’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한비자』와 대조적인 『정관정요』 또한 당태종과 그를 보좌한 명신들의 행보를 다룸으로써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한 원리와 리더의 자질을 통찰하고 있다.

이 책은 조직 운용과 리더십의 기본 원칙을 가장 충실하고도 자세하게 담고 있는 동양 고전으로 널리 평가받아왔다. 역대 중국에서 가장 큰 제국을 이룬 당나라, 그중에서도 ‘정관의 치[貞觀之治]’라는 으뜸의 태평성대를 이룬 당태종 시기의 일을 철저하게 사관에 의거해서 기록하고 있는 정치토론집이다. 당태종이 세계 최강의 제국을 이루고 그것을 유지시켜 나간 데 대한 비법이 무엇인지 후세에 전하기 위해 ‘교육적 관점’에서 당태종과 신하들이 나눈 이야기를 조목별로 재편집한 책이며 당나라 이후 역대 군주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과 한국에서도 치국의 군신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교과서로 여겨져 널리 읽혀왔다.





군신 간의 치열한 토론에서 피어나는 건강한 긴장감





“나는 일찍이 폭군 걸왕이 관용봉을 죽이고, 한경제가 조착을 죽였을 때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글을 읽었소. 그대들이 바른말로 나의 뜻을 거스른다고 하여 마음대로 벌주거나 질책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가 근래 조정에서 정무를 처리할 때 나라의 법령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소. 그러나 여러분은 사소한 일로 여기고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소. 무릇 큰일은 모두 작은 일에서 시작하고, 작은 일을 논의하지 않으면 큰일 또한 구할 수 없으니, 사직이 기울고 위태롭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소.”



태종 이세민이 제위에 오른 것은 627년이며 그로부터 24년이 지나는 649년까지 그의 통치기가 이어진다. 당시 그는 널리 이방인의 땅까지 그 세를 넓히며 나라도 안정을 되찾는 가운데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던 차였다. 그러나 신하들과 당태종은 전 시대의 역사책들을 두루 섭렵하며 ‘군주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는 덕행이 빛나고 공적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세력은 곤두박질친다’는 경고를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태종은 스스로 그렇게 될까 매우 경계했고, 그의 신하들 역시 군주가 사치하는 마음을 갖고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잃을까 곁에서 노심초사했다. 그중에서도 충신 위징은 군주의 덕이 자연스럽게 백성들을 교화해 다스리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무위지치無爲之治에 이를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백성들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태종은 신하들에게 간언을 아끼지 말 것을 철저히 요구하는데, 그런 까닭에 이 책 대부분의 내용은 신하들의 간언과 이에 대한 태종의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10권 40편으로 구성된 『정관정요』에는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왕규王珪 등 충신들이 등장한다. 이에 태종이 신하들과 함께 담소를 나눈 책문策問·쟁간諍諫·의론議論·주소奏疏를 분류해 편찬한 것이다. 하지만 역대의 황제들이라고 하여 간언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는데도 간언이 이뤄지지 못했던 것은 한비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저의 말이 주상主上의 뜻을 좇아 유창하고 아름다우면 보기에 화려하지만 부실하다고 생각되고, 공경스럽고 삼가며 강직하고 신중하면 보기에 옹졸하며 순서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말을 많이 하고, 번번이 사물을 거론하며 비슷한 것을 열거하여 사물을 비유한다면 그 내용은 공허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정미한 부분만을 꼬집어 요지를 설명하며 간략히 말하고 수식을 더하지 않는다면 언사가 생경하여 말재주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떤 신하가 어떤 말을 해도 왕은 그 속성상 탐탁지 않게 여겨지기 마련이었고, 이 때문에 간언이 줄어 나라는 멸망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그 책임을 신하에게 물어야 하는가? 당태종은 이 책에서 그 일차적 책임은 올바른 간언을 할 수 없도록 한 군주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다음에야 신하로서의 책무를 논할 여지가 생긴다. 태종은 순임금과 요임금을 모범으로 삼아 경전에 근거해 자신에게 조언할 수 있는 신하들을 항상 가까이 두려 했다. 이렇듯 태종의 노력이 있자, 위징과 방현령 등은 간언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것에 대한 한 치의 거리낌 없이 조언과 질타를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물론 태종 이세민에 대한 것뿐 아니라 황태자에 대한 질책으로도 이어진다.

가령 이 책은 태종이 한 실수들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반역자의 여자를 빼앗고, 건원전을 중수하여 백성의 혈을 낭비하며, 자신의 준마 한 필이 이유 없이 죽었다며 이를 사육한 관리를 사형에 처하려는 위기의 순간들이 다가올 때마다 충신들이 강력히 비판하고 나선다. 그런 까닭에 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인 태종은 역사책에 남겨진 자신의 오점을 줄일 수 있었다. 그 역시 인간이라 술잔마다 채색하고 문양을 넣는다거나 침구에도 무늬를 넣는 등 사치와 탐욕이 없을 수 없었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욕망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 황폐함, 기아, 추위였다. 그런 까닭에 태종은 궁전 건축에 사용된 나무의 질이 너무 좋거나 의복, 노리개 등이 사치스럽다면 이것이 곧 나라가 망할 시기가 가까워올 징조라 여기고 신하들의 간언을 들어 스스로 경계했다.

한 예로 태종이 머물던 황궁 안의 낮은 곳이 습해 신하들이 누각을 지을 것을 권하자, 태종은 “나는 기력이 쇠약한 질병이 있는데 어찌 낮고 습한 곳이 거주 조건에 맞을 수 있겠소?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요청에 동의한다면 실제로 낭비가 많을 것이오. 일찍이 한문제는 노대를 건축하면서 열 가구의 재산에 상당하는 비용을 아까워하여 세우지 않았소. 나는 덕행에 있어서는 한문제를 따르지 못하고, 재물을 소비함에 있어서는 그를 넘어서고 있으니, 어찌 백성들의 부모인 군주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소?”라며 완강히 거절했다.

특히나 황제나 황태자는 모두 구중궁궐에 갇혀 있어 천하의 일을 모두 볼 수 없기에 신하들을 눈과 귀로 삼았다. 더욱이 태종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소우라는 신하에게 “수문제는 어떤 군주였소?”라고 물어 소유가 문제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언급하며 훌륭한 왕이었다고 말하자, 태종은 오히려 정반대의 시각에서 그 인물을 평가하며 이를 자신을 경계하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 가령 수문제의 꼼꼼하고 사리의 밝은 성격이 화두가 된 것인데, 태종은 이런 성격은 군주로서는 적당치 못하다며 신하들과의 토론을 이어나간다.

이처럼 군주로서 듣는 귀가 열려 있었던 때문인지 근신들은 당태종의 태자 승건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풍자와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백약, 공영달, 장현소 등은 부賦나 상소를 올려 고대 어진 태자와 그렇지 못한 태자의 일상생활과 최후를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그러나 승건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해치려는 악행을 범하여 결국 폐위되고 만다.

이처럼 『정관정요』는 군신 간의 문답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왕과 신하 모두 경전의 어구들을 종횡으로 인용하고 미사여구를 사용해 난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 내용은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회요唐會要』 등에 기록된 것과 비교할 때, 보다 깊이가 있고 상세하며 체계가 갖추어져 태종이라는 인물과 당대 초기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역자의 주가 매우 상세해 오늘날 이를 읽는 독자들로서는 고전의 다양한 인물과 문구들을 읽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정관정요』의 편찬 동기와 내용



당나라 때의 정사 편찬은 그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여기에 과거 중국 역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요구됨에 따라 역사적 기록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한다. 『정관정요』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 현종 개원開元 후기에 완성되었다.

특히 오긍이 『정관정요』를 편찬하게 된 동기는 당시 측천무후의 전횡과 무관하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뛰어난 미모로 14세 때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는 황제가 죽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후 그녀는 간계를 써서 황후 왕王씨를 모함해 쫓아내고, 655년 스스로 황후가 되었다.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해,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로서 15년여 간 지배하며 전횡을 일삼는 것을 목격했던 오긍은 역사의 운명을 주재하는 최고 통치자 집단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국가의 사직에 막대한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통감했다. 오긍은 태종의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고대 역사를 거울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한 말을 가슴에 새기고 ‘정관지치’를 그리워했다. 그리하여 사관으로서 자신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당나라 재건에 필요한 정치철학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판단해 불후의 명작 『정관정요』를 집필해 중종에게 바친다.

그러나 지도자적 역량이 달렸던 중종은 오긍의 충정을 저버리고 황후 위씨韋氏 일족으로부터 시해된다. 이에 오긍은 『정관정요』를 다시 현종에게 바쳤다고 한다. 따라서 『정관정요』는 중종에게 바친 초진본과 현종에게 바친 재진본 두 가지가 있다는 추론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오긍은 『정관정요』를 집필하면서 중국인의 역사 서술 원칙인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고수하고자 했다. 춘추필법이란 역사적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정확하게 직서直書하고 포폄褒貶하며 그것으로서 가치판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역사가에게는 어떤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선행과 악행, 명예와 치욕 등에 관한 평가와 역사적 위치 등을 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여되었다. 사관으로서의 오긍의 이러한 권한은 『정관정요』의 내용 속에 십분 발휘되어 태종의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까지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신하들의 간언을 통해 나타난다.

각 권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1권은 군주가 갖춰야 할 도리와 정치의 근본에 관한 논의이고, 2권에서는 어진 관리의 임명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3권은 군주와 신하가 거울로 삼아야 할 계율, 관리 선발, 봉건제에 관한 것이고, 4권은 태자와 여러 왕들을 경계시키는 내용이며, 5권에서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인仁·충忠·효孝·신信 및 공평함에 대해 문답하고 있다. 6권에서는 절약과 사치, 겸양 등을 말하고 있으며, 7권은 유학·문학·역사 등을 다루며, 8권에서는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ㆍ형법ㆍ부역ㆍ세금 등을 논하고 있고, 9권에서는 국외적 문제인 정벌과 변방 안정책을 언급하며, 10권에서는 군주의 순행이나 사냥 등에 있어 신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이후 여러 왕조에서 꾸준히 간행되어 애독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왕의 통치철학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당나라 선종은 이 책의 내용을 병풍에 써서 널리 읽히도록 했으며, 금나라의 세종은 각본으로 펴내어 권장했고,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는 이 책을 애독해 「독정관정요讀貞觀政要」라는 시와 「정관정요서貞觀政要序」라는 글을 지었고, 또 『당태종론唐太宗論』이라는 책을 썼다. 또한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정권을 잡은 시대적 상황이 태종이 정권을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분열에서 통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므로, 『정관정요』를 애독해 일본 통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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